논개의 흔적이 있는 진주성
-[10일차]한국카메라 한국을 담다
국립진주박물관을 방문해 보기 위해 진주성을 찾았다
방문 전에는 국립진주박물관과 진주성이 같이 위치하고 있는지는 몰랐었다
국립진주박물관이 있는 진주성은 자체에 임진왜란의 뼈아픈 역사? 가 많이 남아 있었다.
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.
국립진주박물관을 관람한 후 촉석루가 있는 쪽에 도착했다
(촉석루 쪽에 논개가 죽은 바위가 있다는 사실도 여기 와봐서야 알았다.)
촉석루는 진주성을 지키던 주장의 지휘소였다고 한다.
그렇지만 논개로 더 유명한 곳인 거 같기도 했다.
[촉석루 :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호, 정면 5칸, 측면 4칸, 고려 말의 진주성을 지키던 주장의 지휘소이다. 1365년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라고도 하였다.
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(진양지)에 고려 때 김중선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하였다고 하였으며,(동국여지승람)에는 김주가 영남루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. 누기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과 판관 박시결이 중건하고 하륜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.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,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. 현재의 건물은 6.25 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재건한 것이다. - 출처 : 두산백과].
바로 그 촉석루 아래에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인 의암이 위치하고 있었다.
[의암 :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이다 조선 선조 26년(1593년) 6월 29일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 관 군이 순결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남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인조 7년 진주의 선비 전대릉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는 전서체로 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벽면에는 한몽삼이 쓴 것으로 전하는 해서체로 된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
의암의 바닥 넓이는 3.5m 3.3m이다. - 공식소개문 中]
입구까지 마련이 되어 있어 그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의암을 보니 정말로 발을 잘못 디디면 죽을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.
솔직히 약간 겁이 나는 높이이기도 했다.
사실 나라를 위한 일이지만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것은 힘든 결정일 것 같다.
만약 내가 논개였다면 저럴 수 있었을까?라는 생각을 해보았다.
아마 나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을 것 같다.
그러한 결정을 나라를 위해 한 논개 정말 멋있는 거 같다.
그래서 일까? 국립진주박물관 앞에는 논개와 관련된 공연? 이 준비 중이었다.
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게 되고 촉석루 같이 편히 와서 쉴 수 있는 곳이 있는 진주가 약간?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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